서용선의 '신화'_또 하나의 장소

11월 06, 2014

서용선의 ‘신화’_또 하나의 장소

제26회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 / 조선일보미술관 / 2014.11.06 – 11.16

전시기획 :이인범 (상명대학교 교수)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의 카탈로그 서문 「신상의 베일을 벗긴 화가, 서용선」 중에서

인간이란 지각할 수 있는 세계와 직관할 수 있는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경험론이나 합리론의 철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나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데 충실한 사람들이라면 지각의 세계만을 세계의 전부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오관으로 지각하지 못하지만 직관할 수 있는 세계가 달리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고대와 중세의 사람들은 지각의 범위가 작고 좁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직관의 세계와 더욱 깊이 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문명과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도 지각의 세계보다 직관의 세계를 더 믿고 초월의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종교적 심리가 발달한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술적 감수성이 섬세한 사람들도 그러하다.
여기 직관의 세계를 동경하고 초월의 상상을 화폭에 담아내는 우리 시대의 화가가 있다. 서용선, 이 분이 그 화가이다.

경기도 양수리의 거처를 찾아가 화실을 둘러보면서 나는 이 분의 화폭에서 붉은 눈이 붉은 심장으로 변화하고 붉은 심장이 붉은 태양으로 변화하였다가, 다시 붉은 태양이 붉은 심장으로 번전하고 붉은 심장이 붉은 눈으로 번전하는 환각을 경험하였다. 그 변화와 번전은 동아시아 공통의 신화가 담지해 왔던 생명의 다이나미즘이 극적으로 재현된 것이었다.

서용선 화가가 화폭에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신성한 존재들은 한국의 고유한 사상과 동아시아의 보편적 사상에 두루 관계 되어 있다. 마고와 하백은 우리나라의 신화에 나오는 신격들이다. 반고, 치우(탁록의 전쟁), 서왕모(곤륜산), 회화, 상희, 뇌신, 천제, 예, 항아, 견우와 직녀, 반호와 늠군, 제준, 과보, 기국, 우민, 망량, 궁귀, 불사민, 창힐, 요왕과 순왕, 탕, 주문공과 강태공, 곤과 우, 백이와 숙제 등은 동아시아의 고전 속에 나오는 신성한 존재들이다. 귀두조, 문요어, 주별어, 육어, 박, 추오, 비익조 등 귀물과 삼신산, 거격송, 미곡, 단목 등 신령한 사물들도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이 공유하는 신성한 자연물들이다. (하략)

——————————이인범 (상명대학교 교수)의 카탈로그 서문 「서용선의 ‘신화’또 하나의 장소」 중에서

화가 이중섭은 서용선에게도 ‘신화’같은 존재였다. 캄캄한 한국 근대미술사의 밤하늘에 빛나는 별자리 가운데 하나같은. 언젠가의 고백대로라면, 그가 화가의 길로 들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는 친구 집에서 우연히 접한 이중섭 관련 신문기사였다. 형편상 대학 진학도 못한 채 군복무를 마치고도 방황을 거듭하던 시절, 이중섭은 그에게 자유로운 비상의 상징으로 혹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체험으로 새겨진 인물이다. 그것도 분명히 신화 체험이다. 그렇지만 정작 ‘신화’가 살아 꿈틀대는 평양 근처 고구려 고분벽화들의 아우라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억압적인 식민지시대, 전쟁이 자신과 가족 그리고 민족의 삶을 난폭하게 무너뜨리는 고난 속에서 초현실주의적인 상상력으로 예술을 펼치다가 일찍 세상을 뜬 이중섭을 향해 뭔가 말을 걸고 싶었다면 ‘신화’만한 화두가 어디에 있을까? ‘신화’는 이중섭과 작가 서용선이라는 다른 두 세대의 작가들의 작품세계 사이의 상호텍스트성을 확인하기 위한 키워드이다. 미학적 차원에서든, 윤리적 차원에서든, 더 할 나위 없는 만남의 장소이다. (중략)

서용선의 ‘신화’는 지금까지 그가 탐색해 온 삶의 세계가 이제 지질학적 깊이를 향해가는 접점이자 또한 전환점이다. ‘신화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신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은 채 ‘인간의 삶의 세계란 무엇인가?’를 따지는 일의 덧없음에 대한 따가운 자기반성이자 통찰로서.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이 땅 위에 인간의 고정불변한 한 척도로서 모실 신들의 세계가 아니다. 단지 그러한 ‘신화 이야기’ 그리기가 아니다. 그것은 한 낱 문학적 서사가 아니다. 우리의 나날의 삶을 에워싸 일깨우는 현실이며, 살갗으로 파고드는 현상학적 신체적 현실이다.(중략)

‘신화’ 속의 화가, 이중섭. 그런데도 신화는 신화일 뿐 그의 작품세계는 재해석되거나 새로운 상상력으로 날개 한번 제대로 펼쳐진 적이 별로 없는 것이 신기하다. 구태의연한 작가 ‘신화’로 오히려 정작 살아 움직이는 미술사의 전개로부터 그의 예술세계를 유폐시켰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신화’에 갇히고 만 ‘신화’적인 화가 이중섭이나 ‘역사화가’ 혹은 ‘표현주의 화가’라는 상투적인 호명에 갇힌 서용선. 그렇다면, 후배 화가 서용선이 앞서간 화가 이중섭을 기억하며 우리 화단에 제기하는 문제로서 ‘신화’를 통해, 미술사적 세대의 간극을 넘어 두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가려지거나 감춰졌던 진실들이 어떤 편린으로나마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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